어린사자 사자흉내 [2]

어린사자 사자흉내
화엄사에 머물고 있는지 얼마 안돼서 하루는 도진호(都鎭浩)씨가 나를 보더니 대중 앞에 나와 법문을 한 번 해보라고 한다. 도진스님은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제1차 태평양 종교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던 유명한 사람인데 그 당시 쌍계사에서 화엄사로 전적해온 직후였었다. 그들은 송고아사 삼일암선방에서 수좌가 왔다고 해서 어떤가 하고 알아볼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저 바닷물을 어떻게 다 먹을꼬』 이 생각만 하고 지냈던 나였지만 어쩐지 내 소신대로 한 번 말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화엄사 적묵당(寂默堂-큰방)에 법상을 차려 놓았는데 학인이 三○명 쯤은 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그 자리에 이르니 말잘하는 도진호변사가 일어서서 일장 소개말을 하였다. 『오늘 삼일암선방에서 견성성불을 목적하여 참선하는 애기수좌의 법문을 들을텐데』 이 수좌님의 말을 한번 들으면 귀가 번쩍 뚫릴것이라고 굉장한 소개를 했다. 이쯤되니 나도 용기를 내서 법상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는데 올라가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저 사람들은 글을 많이 읽었는데 나는 배운것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해서 저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곰곰히 생각하였다. 나는 선방에 있으면서 조실스님이신 조예운스님이나 최혜문스님이나 김석암스님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것 저것 정리해보았다. 그중에 김석암스님이 장자(莊子)에 있는 이야기를 해준 것이 그럴싸하게 생각났다. 그리고 조실스님 법문하시는 것을 여러번 보았던 터라 그 흉내를 내 볼 것이라 작정하고 법상에 올라 앉았다. 대개 종사법문에서 처음 주장자를 탕 구르고 『이 도리를 아는 사람은 말을 하라』하고 나서 내중도 답을 하고 거기에 종사도 의견을 펴는것이 관례가 아닌가. 나도 그 흉내를 내기로 하였다. 그리고서 막상 법상에 오르니 학인들의 이목이 일시에 집중되면서 <무슨 저런 어린사람이 올라왔는가>하는 눈치가 환히 들여다 보였다. 나는 주장자를 잡고(원숭이 흉내를 내듯) 방아찧듯 세번을 구르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말이 막힌다. 가슴도 두근대고 순간 괜히 올라왔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미 올라왔으니 도리없다 하고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내가 이 주장자를 여기 세웠는데 대중이 이 주장자를 다 보고 있다. 그런데 대중이 주장자를 볼때 주장자가 대중을 보는 것을 아십니까. 아는 이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그러나 학인들은 다행히 아무 말이 없다. 나는 주장자를 다시 한번 쾅 내려 찍고는 게송을 하나 읊었다. 이것도 삼일암에서 들은 풍월이다.
『매석(每夕)에 득운요(得雲饒)하고 이화(怡花)에 겸접비(兼蝶飛)라』 (돌을 사니 구름이 넉넉한 것을 얻고, 꽃이 피니 나비가 나는 것을 겸했더라.)
그 다음에 장자 이야기를 들은 대로 해나갔다.
어쨌든 내가 생각한대로 소신껏 해본 셈이다. 그러고 내려오니 도진호스님이 또 찬사가 대단했다. 말하기를 『젊은 소년수좌가 이런 장광설(長廣說)을 하는 것을 보니 과연 말세에 불일(佛日)이 재휘(再輝)라. 불교의 진리가 무궁무진한데 이 도리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알았을 것이다. 나도 크게 놀랐다』한다. 하여튼 굉장한 칭찬을 하였다. 내가 법문을 하는 도중에 진응스님이 나와서 지켜보고 계셨는데 나를 보시고 『하하! 어린사자가 사자흉내를 내는구나 선방에 있다고 하는 것이 한결 낫다』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앞을 일단은 통과하였는데 그 이후 진응스님에게는 자주 찾아뵈어 법문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하도 많았다. 또 말은 흉내낼 수 있었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을 문자를 배워서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화두를 가지고 죽던 살던 씨름하겠다는 생각만이 솟구쳐 올라왔다. 진응스님을 뵙고 난 후 나의 생각은 <학문을 하자면 진응스님만큼 당당하여야겠고 그러자면 나로서는 용맹정진만이 살아날길이다>라는데 굳어졌다.

七佛禪院
삼일암에서 첫 철을 지낸 나는 봄 해제동안 화엄사에 가서 느낀 것이 적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고 지리산 칠불선원으로 갔다. 그해가 을축년이다. 옛 칠불을 지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오늘의 젊은 사람들도 말을 들어서 알 것이다. 七불의 아자방(亞字房)을 말이다. 전란으로 지금은 아자방의 이름과 빈 터만 남았지만 아자방선원은 참으로 훌륭했다. 동국제일선원이라고 현판을 걸었었지만 그럴만도 했다. 진실 발심한 청풍납자만 모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했다. 내가 방부를 드리니 나에게는 다각(茶角)과 선방 부존(扶尊)의 소임이 배당되었다. 어느 소임이 가벼우랴만 나로서는 별 일 아니었다. 오직 선배 전객 틈에 끼어서 부지런히 화두에만 매달렸다. <바닷물을 어떻게 통채로 다 마실꼬> 이 생각만을 붙잡고 자나깨나 씨름질을 하였다. 평소에 가행정진하다가도 특별히 용맹전진하는 것은 반산림을 앞둔 七일 전이다. 나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용맹정진에 돌입하였다.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찬물에 밥 한 술 말아서 김치국 떠먹는 것으로 허기를 달래고 정진하는 것이 그때에 있어 내가 잠을 이기는 도리였다. 칠불에 와서도 이 방법을 계속했다. 먹고 싶은 것 닥치는대로 실컷 먹고 참선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럴수 없었다. 참선은 의정(疑情)이 성성(惺惺)하여아 하고 그러자니 혼혼하게 졸고 앉아서는 참선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백가지 계교를 써서 화두가 성성하기에만 힘썼던 것이다.
용맹정진이 끝나면 대중들이 둘러앉아 제각기 소견을 한 마디씩 말하는 것이 관례인데 그때는 임춘명(林春溟)스님이 선문촬요를 펴고 얘기를 했다.
춘명스님은 원래 강사 출신인데 선방에 와서 골돌이 정진하던 훌륭한 대선객이었다. 그런데 춘명스님이 『심동풍요수(心動風搖樹)하고 운생성기진(雲生性起塵)이라...』하고 읽는 것을 듣자 이거 잘못됐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곧 내 의견을 말하였다. 어떻게 말하였는고 하니 『심동(心動)하니 풍요수(風搖水)요 성기(性起)하니 운생(雲生)이라...』이런 식으로 되어야 옳다고 소견을 말하니 춘명스님이 말하기를 『석(晳)수좌가 득의(得意)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때 내 이름은 병석(秉晳)이라 하였었다.
그때 대중은 十五명 가량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자들은 생각해보라. 저 지리산 높은 봉우리. 그사이 전망이 훤출한 칠불도량에서 청풍납자들 틈에서 오직 참선만을 생명으로 삼고 푸른 하늘을 향하여 마음껏 내닫고 있던 그 당시를 생각해 보라. 나는 정말 그때를 돌이켜 생각할수록 지금도 마음이 밝아오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지내던 대중 가운데 김수일(金守一)스님이 있었다. 본사는 화엄사인데 원래 사판 출신으로 발심하여 선방에 와 있었다. 수일스님은 여러 선지식을 찾아 모시고 지낸 경험이 있었는데 그전에 한암스님 화상에서 지냈던 터라 나에게 그곳에 가보라고 권하였다. 나도 참선문에 발을 딛어 놨을봐엔 큰 선지식 밑에서 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일스님에게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곧바로 서울 봉은사로 갔다.

寒巖 龍城회화에 가다
나는 이렇게 하여 을축년 가을에 한암스님을 찾아 뵈워 그 동안에 지나온 이야기를 소상히 말씀드리고 인도해 주실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첫 느낌에 위풍당당하시고 위엄이 있어보이는 한암스님은 또한 춘풍과 같은 인자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나시더니 여러말 하지 않으시고 『선재동자는 五三선지식을 찾아갔었다. 너는 이제 봉익동으로 용성스님을 뵙고 오너라』하신다. 용성스님이 당대의 선지식이고 납자를 잘 인도하신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던 터이라 나는 지체없이 곧 봉익동 대각사로 갔다.
대각사에는 선방에는 선객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공부를 묻는 신도들도 수없이 출입하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김경성(金擎惺) 표회암(表檜庵) 최기종스님이 모시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용성스님을 뵈워 한암스님 회하에서 왔다는 뜻을 말하고 공부길을 가르쳐줄 것을 청하였다. 용성스님은 그 동안 내가 공부하던 것을 듣고 나시더니 일구흡진(一口吸盡)은 그만두고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하라고 하시며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이 무자화두를 하는데 조주는 어찌하여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고. 조주는 인심도무(因甚道無)오? 이렇게 지어가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대각사에 七일동안 머물면서 법문을 듣고 참선하다가 봉은사로 돌아왔다. 그때 삼일암스님의 허가를 받아 한암스님을 은사(친교사)로 정하게 되었는데 그때 한암스님께서 주신 이름이 성관(性觀)이었다. 그해 十월에 용성스님이 계단을 개설하셨는데 거기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만일 결사도 하였는데 그때에 계단에 참례하였던 영광을 길이 간직하고 싶다.
이렇게 하여 나는 결국 한암스님과 용성스님이라하는 당대 최고봉 선지식 밑에서 배우게 되었으니 고기로 말하면 도랑의 고기가 큰 강물에 나온 것만은 분명했다. 서당에서 장난만 일삼으며 반항하던 악동시절이나 맹자를 읽다가 어떻게 흩어진 마음을 수습하여 거둬 들이느냐 들어대다가 쫓겨난 일이나 그 끝에 선문에 찾아오게 되어 마침내 이제 대선지식 회하에 이르게 되었으니 생각할수록 감개무량했다.
나는 한암스님을 모시고 지내고 또 제방에 다니며 참선하였지만 내 마음의 스승은 한암, 용성 두 스님이었다. 한암스님에게서 배우고 용성스님에게 물어서 공부해갔던 것이다. 지금에 돌이켜 보아, 두 큰스님에 비하면 나는 비록 미미한 존재이긴 하지만 두 선지식 스님을 마음에 모신 영광을 길이 새기며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