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의 윤회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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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사상"은 불교에서 최초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바라문교"에서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학자들간에는 불교의 윤회설이 "권선징악적" 효과를 위해 인도 재래의 윤회설로부터 수용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인도 바라문교의 윤회설이 "아트만(我)"을 전제로 하여 그 아트만이 옛 육신을 떠나 새로운 육신과 결합하는 것을 가정하여 "성립"한 것에 반하여. 불교의 윤회설은 "선악업보의 필연성을" 인정함에서 설정된 논리적 귀결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이 그런 "아트만"을 전제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무아윤회설(無我輪廻說)"이라 불리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굳게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윤회의 삶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경전"에서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윤회의 교설을 설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육도집경]제8권의 "찰미왕경(察微王經)"의 예화는 그 대표적인 경우이므로 소개 하고자 한다.
"예전에 보살이 왕이 되니 이름이 찰미였다. 뜻이 맑고 밝아 불경을 받아 익혀 마음을 옳은데에 두고 깊이 사람의 시초를 보고. 중생의 생사가 끝이 없음을 신하들에게 깨우쳐 주려 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의심하여 말했다.
"몸뚱이가 죽어도 혼신이 살아 있어서 다시 다른 몸을 받는다 하나. 저희들은 여럿이지만 과거세상을 아는 이가 적습니다."
이에 왕은 한가한 날 추한 옷으로 성을 나가 신을 깁는 늙은이에게 가서 묻기를 "이땅에서 누가 가장 즐겁겠는가?" 하였다. 늙은이는 "왕이 제일 즐거울 것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즐거움이란 어떠한 것일까? "백관이 떠 받들고 백성이 재물을 올리니 무슨 소원이고 마음대로 이룰수 있으니 이것이 즐거움이 아니냐."
"과연 그렇다"하고 술을 마시게 하였더니 늙은이는 취하여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 왕은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왕의 옷을 입히고 정사를 돌보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모른척 하라고 일러 두었다. 그가 술을 깨자 시종이와서 시치미를 떼고 말하였다.
"대왕님! 술이 취하신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이 밀렸사오니 평상대로 살피셔야 하옵니다."
그가 나아가서 집무하려 하매 백관들이 일을 바로 잡도록 재촉하니 어둡고 답답하여 동인지. 서인지. 알수가 없었다. 자리에 종일 앉았으나 온몸이 아프고 날이갈수록 수척하여 졌다. 궁녀가 천연덕 스럽게 물었다. "대왕님! 신색이 좋지 않으시니 어찌되신 일이옵니까?"
대답 하기를 "내가 꿈에 신기료 장수가 되어서 밥벌이를 하느라고 몹시 애썼더니 그런가 보다." 하니 모두 속으로 웃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왕비가 와서 기악을 갖추며 자꾸 술을 권하였다. 거듭 취하여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자 도로 그의 옛옷을 입히고 본래 처소에 데려다 놓았다. 술이 깨자 곧 눈을 떠보니 더러운 방에 추한옷이 여전하였고 온몸이 아파 두둘겨 맞은것 같았다. 수일후에 왕이 또 갔더니. 늙은이가 말하기를. "먼저 그대가 준 술을 마시고 깊이 취하여서 아무것도 모르다가 이제 비로소 깨었노라." 그동안 꿈에 왕이 되어서 일을 살피는데 사관은 허물을 기록하고 백관은 충고하고 하여 마음이 황황하고 초조하였으며 마디마디 아픈것이 이루 말할 수 없었노라" 하였다. 왕은 궁으로 돌아가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말하니 웃음소리에 귀가 시끄러웠다.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 한 몸뚱이로 겪은 것을 보고 듣고 하여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어찌 하물며 세상을 달리하여 옛것을 놓고 새것을 받으며 다시 귀신에 시달리고 병으로 고통한 여러가지 어려움이랴. 그런데 혼령이 되어 가서 몸을 받는곳을 알고자 하니 어찌 어렵지 않으랴. 경에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가 여러 사특함을 품고 혼령을 보고자 하는것은 마치 '청맹과니'가 그믐밤에 별과 달을 우러러 보려는 것과 같으니 몸을 괴롭혀서 이가 빠지도록 한들 언제 능히 보겠느냐고 하셨느니라." 이에 여러 신하들과 온 나라 백성들이 생사의 윤전함이 끝이 없음을 알고 그 나아가는 바를 믿었다.
** 잡아함경 938번째 경은 눈물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윤회의 무량함을 설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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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는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 하셨다.
"중생들은 처음이 없는 나고 죽음으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동안 생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괴로움의 끝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 하는가?" 강가(갠즈스강)의 흐르는 물과 내지는 네 큰 바닷물과 너희들이 과거 오랜동안 나고 죽음에 바퀴돌면서 흘린 눈물과 어느 쪽이 많겠는가?" 비구들은 사뢰었다. "저희들의 생각이 세존께서 말씀 하신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 저희들이 나고 죽음을 거듭하면서 흘린 눈물은 강가나 바닷물보다 훨씬 많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그렇도다. 너희들이 과거 오랜 동안 나고 죽음에 바퀴돌면서 흘린 눈물은 훨씬 많아서 저-강가나 네 큰 바닷물 따위가 아니니라. 무슨 까닭인가? 너희들이 과거 오랜동안 부모.형제.자매.친척.친구들을 잃고 또 재물을 잃기때문에 흘린 눈물은 매우 많아 한량이 없는 것이다. 또 너희들은 과거 오랜동안 묘지에 버려졌을 때나 지옥 아귀로 태어나 고름과 피를 흘렸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너희들이 처음이 없는 나고 죽음으로부터 과거 오랜동안 바퀴돌면서 그 몸에서 흘린 피눈물은 매우 많아서 한량이 없느니라."